궁칙통(窮則通) : 궁하면 통한다

황해도 어느 고을에 만수라는 총각이 살았는데

가세가 무척 빈한하고 조실부모해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나이 20이 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고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칭칭 땋아서

늘이고 다녀야만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영리한 편이고 또 부지런해서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만은 잃지 않았다.

만수의 유일한 소원은 장가를 드는 일이었으나

그의 형편이 어려운지라 아무도 딸을 주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 같은 동네 부잣집 김좌수에게 과년한 딸이

있었는데, 얌전하고 인물 또한 으뜸이라 웬만한

혼처는 거들떠보지 않다가 그만 혼기를 놓쳤다.

김좌수의 딸을 마음에 두었던 만수에게 어느날

좋은 묘책이 떠올랐다.

초여름이라 한참 농사짓기에 바쁜 때지만 장가

드는 일이 급한 만수는 김좌수 댁을 찾아갔다.

다행히 몇몇 하인들은 모두 농사일로 들에 나간

모양이라 거침없이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처녀가 거처하는 방앞에 가서 가만히

동정을 살피자 처녀는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만수는 서슴치 않고 처녀의 방문을 열어젖히고

다짜고짜 "궁(宮)?"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와 버렸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처녀는 어리

둥절하여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했으며 더구나

'궁'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더욱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만수는 위 아래 동네를 돌아

다니면서 소문을 퍼뜨렸다.

"나는 우리 동네 김좌수 댁 따님과 '궁'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인근에 퍼졌다.

"여보게들 만수가 김좌수댁의 따님과 궁했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그것도 모르겠나? 만수가 그 댁의 따님과 정을

통했다는 말이겠지 뭔가?"

"그게 사실일까?"

"만수가 무식하기는 하여도 거짓말은 안한다네.

노총각이니 있을 법도 한 일이고..."

"김좌수가 만수에게 딸을 줄까?"

"안 주면 별 수 있겠나?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도리가 없겠지."

드디어 소문이 김좌수의 귀에 까지 들어갔으며

김좌수는 노여움에 치를 떨면서 딸에게 물었다.

"그게 사실이냐?"

"소녀는 그런 일을 저지른 일이 없사와요."

눈물짓는 딸의 모습을 보고 귀여운 딸의 누명을

벗기고자 김좌수는 고을 관가에 송사를 걸었다.

송사가 시작되자 사또는 세 사람 앞에 추상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듣거라, 본관이 묻는 말에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관명을 좇지 않은 죄로 호된 벌을 면치 못하리라. 알겠느냐?"

"예!"

세 사람은 사또 앞에서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럼 만수에게 먼저 묻노니, 너는 아무 날 아무

시에 김좌수의 딸이 거처하는 방으로 가서 궁한

사실이 있느냐?"

"그러한 사실이 있사옵니다."

"궁이라 함은 김좌수의 딸과 관계를 맺었다는

말이렸다?"

"사또께서 통촉하옵소서."

"다음은 김좌수의 딸에게 묻노니, 만수가 모일

모시에 너의 방으로 와서 궁한 사실이 있느냐?'

"네, 그런 사실은 있사옵니다."

딸의 대답은 다만 만수가 다짜고짜 자기 방문을

열고 말로써 궁하고 달아나 버린데 대한 사실을

뜻하는 것이었으나,

듣기에 따라선 과년한 처녀가 춘정을 못이기어

총각인 만수를 불러들여 관계를 맺은 것으로도

들리는 대답이었다.

이윽고 사또는 만수와 김좌수 딸이 혼인하라는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더라고 한다.

- 옮겨온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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