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 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 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문정희 / 시집 <살아있다는 것은>중에서 <남편>











섬 속의 섬 - 발리에서 / 문정희



바다를 포식 하는 섬이다

기름기 자르르한 햇살 속에

망망대해를 통째 먹고 마시는

나는 한 통속의 통속(通俗)이다


이곳에 온 지 사흘

어디 있느냐? 나의 슬픔이여

춥고 캄캄한 문자 속으로 다시 돌아가

별 하나를 기다리는 수인(囚人)이 되고 싶다

고통의 언어를 밥처럼 씹는 시인의 어깨에

외로운 가랑잎을 기대고 싶다


행복은 생각보다 훨씬 오묘해서

시 한 줄에 매어

생애를 탕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이곳 백성들은 모른다


오직 공손한 하인을 데리고 다니며

한껏 때린 작은 공 하나가

제 구멍을 비켜 간 것이 못내 아쉬워

살찐 바닷가재를 입안 가득 넣고도

맛이 없다고들 야단이다


나는 지금 섬 속의 섬이다

몇 낱의 지폐로 왕이 된 관광객들과

뜻없이 만발한 열대꽃들의 웃음 사이를

부유물처럼 떠돌고 있다


추위가 없는 여기는

모조 천국 이다

어디 갔느냐? 갈증과 부재로 굴러 가는

그리운 나의 수레 바퀴 여




늙은 여자 - 여자의 나이 / 문정희


 

여자들은 서른 살 때부터
자신의 나이를 감추기 시작한다


아니, 스물아홉 살 때부터
서서히 부끄러워한다. 돌틈새에 끼인
엉컹퀴처럼 미안하게 서른을 산다


마흔이 되는 날, 촛불 한 개를 켜 놓고
여성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인간이 되는
첫 번째 생일을 맞으리라는
친구여
촛불을 불기 전에 생각해 보아라. 그대
그 날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심지어여자조차 아니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늙은년이 되는 것뿐이로다


여자 나이 마흔 그리고 쉰
저 푸르고 넉넉한 목초지를
벌써 폐허로 내던져 놓고
그 위로 가죽장화 신은 도적떼들 만 지나가고 있다.







갈대숲을 지나며 / 문정희


 

처녀 시절이여, 안녕


나에겐 증거처럼
웨딩드레스를 입고
수염 자리 의젓한 신랑의 팔을 끼고 서 있는
한 장의 결혼 사진도 있지만


이상도 하지
나는 한 번도 결혼한 여자가 아니었네
유부녀는 더구나 아니었네


방목해서 키운 튼튼한 아이들
넉넉한 평수에 편리한 부엌의 안주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처녀였다네


집안에서 잠시 아내이다가
현관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다시 처녀가 되었지


사람들은 모르지
세상엔 결혼한 여자가 없다는 것을
모든 여자가 독신이라는 것을


세상이 가진 자로는
재어지지 않는 넓이와 크기 때문에


할수없이
웨딩드레스 입고 사진 찍은 여자를
결혼한 여자라 묶어버릴 뿐이지



물의 시집 / 문정희


사랑시는 물에다 써야 한다
출렁임으로
다만 출렁임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위험한 거미줄에 걸린
고통과 쾌락의 악보
사랑시 한 줄의 이슬 방울들
저녁 물거품이 상륙하기 전의
꿈같은 신방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면
이윽고 썰물을 따라
가뭇없이 사라지는 물거품의 가락으로


사랑시는 물에다 써야 한다
물에서 태어나고
사라지는 물의 시집이어야 한다


 


거짓말 / 문정희


 

가령 강남 어디쯤의 한 술집에서

옛사랑을 다시 만나

사뭇 떨리는 음성으로

"그동안 너를 잊은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참말일까

그 말이 곧 거짓임을 둘 다 알아차리지만

그 또한 사실은 아니어서

안개 속에 술잔을 부딪칠 때

살아온 날들은 거짓말처럼

참말처럼 사라지고

가령 떠내려가 버린 그 많은 말들의 파도를

그 덧없음을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때 우리는 누구일까

시인일까


 



고향을 찾아서 2 / 문정희


가을도 아닌데 고향 사람들은

모두 낙엽되어 흩어져 있었다.


다리에 구렁이 같은 힘줄이 솟아

쌀 두 가마 등짐지던 사출이 아저씨도

이빨로 소주병을 까던 기훈이 오빠도

엉댕이가 맷돌 같던 쌀장수 화순댁도

모두 어김없이 낙엽이 되었다.


키다리 선출이 칠푼이 알밤이조차도

모두 낙엽이 되었다.


수북한 낙엽 속에서 용케

송장 메뚜기처럼

살아남은 이복 언니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날보고 그 자리에서

땅을 치며 통곡했다.


마른 갈비뼈 사이로

쉬잇쉬잇 해수병이 드나드는

목쉰 울음 속에

그녀는 내 이름 부르지 않고

30년 전에 죽은

울아버지 부르며 통곡했다.


내 슬픔 당당하게 뺏어들고

땅을 치며 먼저 울어버렸다.


나는 슬픔조차 빼앗겨

타관 사람처럼

그냥 서 있기만 했다.


 


 


곡비(哭婢) / 문정희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엄마는

()을 팔고 다니는 곡비(哭婢)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고

그네 울음에 꺼져버린 땅 밑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먹고 살았다.

그네의 허기 위로 쏟아지는 별똥 주워먹으며

까무러칠 듯 울어대는 곡() 소리에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

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일 뿐이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

옥례엄마 머리 위에

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


그네의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

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

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

알아야 하리.


  


새떼 / 문정희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피도 흘러서 하늘로 가고
가랑잎도 흘러서 하늘로 간다.
어디서부터 흐르는지도 모르게
번쩍이는 길이 되어
떠나감 되어.


끝까지 잠 안든 시간을
조금씩 얼굴에 묻혀가지고
빛으로 포효(咆哮)하며
오르는 사랑아.
그걸 따라 우리도 모두 흘러서
울 이유도 없이
하늘로 하늘로 가고 있나니.



혹시 당신도 / 문정희


비오는 날 우산 쓰고 걷다가
불현듯 그리워지는 사람이 당신도 있었나요


아침 먹다 수저 내려놓고 라일락 피었다고

누군가와 수화기 들고 폴짝 폴짝 뛰어본 적이 있었나요


유난히 슬퍼지는 날 젖은 눈물 닦아 줄

가슴이 착한 친구 갖고 싶은 적이 당신도 있었나요


속이 답답해 할 것 같아 그만 묻겠습니다


한 하늘아래 살면서도 사랑하는 사람

얼굴 한 번 못 보고 사는 인연들 허다할 것 같아

- [
혹시 당신도]


강 / 문정희

 


어머니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

불쌍한 어머니! 울다 울다

태양 아래 섰다

태어난 날부터 나를 핥던 짐승이 사라진 자리

오소소 냉기가 자리 잡았다

드디어 딸을 벗어 버렸다!

고려야 조선아 누대의 여자들아, 식민지들아

죄 없이 죄 많은 수인(囚人)들아, 잘 가거라

신성을 넘어 독성처럼 질긴 거미줄에 얽혀

눈도 귀도 없이 늪에 사는 물귀신들아

끝없이 간섭하던 기도 속의

현모야, 양처야, 정숙아,

잘 가거라. 자신을 통째로 죽인 희생을 채찍으로

우리를 제압하던 당신을 배반할 수 없어

물 밑에서 숨 쉬던 모반과 죄책감까지

브래지어 풀듯이 풀어 버렸다

어머니 장례 날, 여자와 잠을 자고 해변을 걷는 사내여

말하라. 이것이 햇살인가 허공인가

나는 허공의 자유, 먼지의 고독이다

불쌍한 어머니, 그녀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

나는 다시 어머니를 낳을 것이다




「독거」  /  문정희



나하고 나뿐이다

뼛속에 유빙(遊氷)이 떠다닌다

나는 나이테 없는 식물 같은 동물

피 다 증발해 버린 빙하기를 사는

독거의 꽃

불가해한 선사(先史)에서 흘러온

소금 기둥이다

불꽃의 순간을 두들기는

허공의 하루살이이다

나하고 나하고 나뿐이다



노래 / 문정희

 


나와 가장 가까운 그대 슬픔이

저 강물의 흐름이라 한들


내 하얀 기도가 햇빛 타고 와

그대 귓전 맴도는 바람이라 한들


나 그대 꿈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그대 또한 내 꿈을 열 수 없으니


우리 힘껏 서로가 사랑한다 한들.

<문정희시집 . 73>

 


  눈을 보며  / 문정


 

눈은 하늘에서 오는 게 아니라

하늘보다

더 먼 곳에서 온다.


여기 나기 전에

우리가 흔들리던 곳.


빈 그네만이 걸려 있는

고향에서 온다.


첫살에 부서지는 그대 머리칼이

반가운 것은

그 때문이다.


한 생애에 돌아오는 목소리이다


우리들의 침묵이 닿지 않는 곳


그렇게 먼 곳에서

눈은 달려 와

비로소 한 조각의 빛깔이 된다.

<문정희시집 . 73>


  그림자 / 문정희


무슨 기별이라도 열릴듯이

꽃은 고요한 빛깔로 설레이고


기별보다 먼저 달려온 밤이

푸른 노래의 늪 속에서

몸살을 앓는다.


가라, 아픈 보석을 끌고

도는 산그림자.

내 쇠사슬의 그림자.

<문정희시집 . 73>


 

   별 / 문정희

 


바람따라 떠난 아이는

쓰러지면서 별이 되었다.


한떨기 흐느낌 속에서

누군가

재빨리 자살한다.


흰 깃털을 뽑히우며

파도가 소리를 치며


손을 펴 보니

다만 꽃들이


너에게는 들리지 않게

圓舞(원무)를 추고 있다.

<문정희시집 . 73>

 

 


  겨울 나무 / 문정희

 


열어 주소서


눈 속에 슬픈 발을 묻고

저 나무들이 서서 울고 있읍니다.


당신의 神의 터전에

바람이 휘몰아치면

삶은 꽃처럼 흔들립니다.


이곳은 어느 곳일까

제가 앉아서

입 맞춘 소중한 모습.


이제 저의 두 눈이 멀어도

살이 터져서 닫을 수 없는 뜨거움을....


벗은 나무여, 벗은 나무여,

제 밀물을 소리치게 해 주소서.


 물시 / 문정희

나 옷 벗어요
그다음도 벗어요

가고 가고
가는 것들 아름다워서

주고 주고
주는 것들 풍요로워서

돌이킬 수 없어 아득함으로
돌아갈 수 없어 무한함으로

부르르 전율하며
흐르는 강물

나 옷 벗어요
그다음도 벗어요



 미친 약속 / 문정희

창밖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풋열매가 붉고 물렁한 살덩이가 되더니
오늘은 야생조의 부리에 송두리째 내주고 있다
아낌없이 흔들리고 아낌없이 내던진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

감나무는 나의 시계
감나무는 제자리에서
시시각각 춤추며 시시각각 폐허에 이른다

어차피 완성이란 살아 있는 시계의 자서전이 아니다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짐승 바다 / 문정희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나뿐인가
그래서 고독은 이리 깊은가

성난 발톱으로 달려드는 절벽 아래
밤바다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바다뿐인가

내 안에서 일어서고
내 안에서 무너지는
천둥의 깊이

해골과 남루와 유랑의 불빛 출렁이는
밤바다를 생포하면 알 수 있을까

지옥보다 외로운
내 안의 내가 보일까

부분-




<칼날의 시〉 전문 / 문정희




불 속 사는 새가 있다


얼음 속에서 날개를 펼치는 물고기도 있다


하지만 나는 너를 어디에도 둘 수 없어


번개처럼 날카로운


칼날 위에 둔다


위태하게 대롱거리는


붉은 눈물방울


이대로 내 사랑 백 년만 가거라


 






<구조대장의 시〉전문 / 문정희

 


지하 700미터 탄광에 매몰된 광부들을


69일 동안 손톱이 빠지도록


모두 파낸 후


구조대장은 소리쳤다


미시온 쿰푸리다! 임무 완료!


33명의 광부들이 지상으로 살아 돌아온 순간이었다


햇살에 땀을 닦으며


병아리가 달걀을 깨고 튀어 나오는 줄탁! 같은


칠레 광산 구조대장의 말을


지상의 TV가 모두 생중계했다


천 길 땅속에서 알알이 귀한 시를 캐낸


구조대장의


미시온 쿰푸리다!


내 사랑! 임무 완료!


그날 지구는 그 한 편의 시로 눈부시었다


 






<이별 시 하나〉의 전문 / 문정희

 


한 시인의 장례식장에서


이별 시 하나가 완성되는 것을 보았다


다른 조문객들 속에 섞여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는 꽃을 올리고 사라졌다


 


날카로운 펜 하나씩 들고 일찍이 신문기자가 되어


천 마디 말을 써서 사회를 흔들면서도


한 마디 말을 삼켜 비켜 간 사랑이었다


  


시인은 그 후로도 언어를 절벽처럼 절제했고


그녀 또한 흰 머리칼 휘날리며 끝내 홀로 지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아는 이가 있을까


너무 일찍 가야 할 때를 알아 버린 낙화를 위해


잠깐 고개를 숙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는 뒷모습을 보았다


 


 



나의 화장법  / 문정희 


 


마치 시를 때처럼

나의 화장법은

먼저 지우기부터 한다


빈자리에 꽃송이 피운다


고통이 보석지팡이가 되고

가난이 장미가 되는 젊음* 불러온다

신비한 샘물이 새로 차오르는

달의 계단을 즐긴다


기실 시법(詩法) 길이 없음을 알고 있다

길을 만들려고 할뿐이다

이게 뭐죠?

어때요?

온몸으로 질문을 뿐이다


오묘한 나만의 이미지와 여백을 만들고

그리고는 누군가의 매혹 때문에


송이 속에서

그만 길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낙타초> / 문정희



'
사막에 핀 가시/

낙타초를 씹는다/

낙타처럼 사막을 목구녕 속으로 밀어 넣고/

솟구치는 침묵을 심장에다 구겨 넣는다//


마른 땅 물 한 모금을 찾아 천길 뻗친 뿌리가/

사투 끝에 하늘로 치솟아/

허공의 극점을 찌르는/

비장한 최후//


뜨거운 모래를 걷는 날카로운 맨발로/

어둠 속 별 떨기 같은 독침을 씹는다//


새처럼 허공을 걷지 못해/

제 혀에서 솟은 피/

제 목에서 흐르는 선혈로 절명을 잇는/

나는 사막의 시인이다.'

사막에서 목마른 낙타는 가시 달린 풀을 삼켜 입 안에 피를 내고 그 피로 혀를 적시며 나머지 길을 간다.



살아 있다는 것은 / 문정희



살아 있다는 것은
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집는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몸을 뒤집을 때마다
악기처럼 리듬이 태어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암각화를 새기는 것이다
그것이 대단한 창조인 양 눈이 머는 것이다
바람에 온몸을 부딪치며
쉬지 않고 바위에게 흰 손을 내미는 것이다
할랑이는 지느러미가 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순간마다 착각의 비늘이 돋는 것이다


  




 부부 / 문정희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꽃 만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찾고 있을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미는 사이이다

자리를 문지르며 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없는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과정과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그런 사이이다


부부란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다


 


오빠 / 문정희*


 

이제부터 세상의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용돈을 제일 많이 쓰고

유산도 고스란히 제몫으로 차지한

우리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오빠!

자지러질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오빠라는 말로 한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꽃이 되지 않으리.


모처럼 물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거칠던 숨소리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러주던 헌신을

어찌 오빠라 불러주지 않을 있으랴

오빠로 불려지고 싶어 안달이던

마음을

어찌 나물캐듯 캐내어주지 않으랴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헐떡임이 사라지고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비단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이제 용케 알아버렸다


 


남자를 위하여 /  문정희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서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서 자신 속에서 으르렁 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 문정희 시집  :  「남자를 위하여 」중에서


다시 남자를 위하여 / 문정희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

싱싱하게 몸부림치는

가물치처럼  온몸을 던져오는

거대한 파도를


 

몰래 숨어 해치우는

누우렇고 나약한 잡것들뿐

눈에 띌까 , 어슬렁거리는 초라한 잡종들뿐

눈부신 야생마는 만나기가 어렵지.


여권 운동가들이 저지른 일 중에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세상에서

멋진 잡놈들을 추방해 버린 것은 아닐까.

핑계 대기 쉬운 말로 산업사회 탓인가.

그들의 빛나는 이빨을 뽑아내고

그들의 거친 머리칼을 솎아 내고

그들의 발에 제지의 쇠고리를

채워 버린 것은 누구일까.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여자들은 누구나 마음속 깊이

야성의 사나이를 만나고 싶어하는 걸.

갈증처럼 바람둥이에게 휘말려

한평생을 던져 버리고 싶은 걸.



안토니우스 시저 그리고

안록산에게 무너진 현종을 봐.

그뿐인가나폴레옹 너는 뭐며 심지어

돈주앙, 변학도, 그 끝없는 식욕을

여자들이 얼마나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런데 어찌된 일이야. 요새는

비겁하게 치마 속으로 손을 들이미는

때 묻고 약아빠진 졸개들은 많은데


불꽃을 찿아 온 사막을 헤매이며

검은 눈섭을 태우는

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은

멸종 위기네.

* 문정희 시집  : 「남자를 위하여 」중에서


 

딸아 미안하다 / 문정희


 (  매주 수요일 정오. 서울 안국동 일본 대사관 앞에는 흰옷 입고 종군

위안부 여성들이 모인다.)


 

딸아, 미안하다

오늘 나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무능한 나라의 치욕과

적국을 향한 분노로 소리 지르다 말고

나는 목젖을 떨며 깊이 울어야 한다

기실 나는 민족을 모른다

  민족의 주체가 남성인 것도 모른다


다만 오늘 앞에 꿇어 엎드려

울음 우는 것은

존엄과 인격을 전리품으로 가져간

일본군보다 깊게

나의 무지와 독선이 슬프기 때문이다

심청을 팔고 , 홍도를 팔고 살아난 아비와 오빠

기생과 놀며 풍류를 더하고

그녀들 화류로 내던진 땅의 강물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녀들을 화류오 내던진 땅의 강물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결국 강압과 사기로 세계에도 유례없는 노예 집단인


적국 군대의 종군 위안부로 보내긴 딸아

민족보다, 민족의 주체인 남성의 소유물이

상처를 입은 어떤 수치심보다도

내딸의 존엄과 딸의 인격이 전리품으로 능욕당한

앞에 나는 무릎 꿇어 사죄한다. 진심으로

미안하다, 딸아

~~ 출처 : 문정희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중에서




손의 고백  //  문정희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의 손이 언제나 욕망을 쥐는 데만

사용되고 있다는 말도 거짓임을 압니다

솨아솨아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무엇을 쥐었을 보다


그저 흘러보낸 것이 많았음을 압니다

처음 다가든 사랑조차도

그렇게 흘러보내고 백기처럼

오래 흔들었습니다

대낮인데도 밝은 어둡고 무거워

상처 입은 짐승처럼

진종일 웅크리고 앉아

숨죽여 사람은 압니다

아무 욕망도 없어 캄캄한 절벽

어느새 촛점을 닮아버린 우리들의 발걸음

집중 호우로 퍼붓는 포탄들과

최신식 비극과

햄버거처럼 흔한 싸구려 행복들 속에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매장된 동물처럼

일어설 수도 걸어갈 수도 없어

가만히 손을 들여보낸 작은 오솔길이

와락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 문정희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중에서

                     


 ♣ 사람의 가을   // 문정희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 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 이 왔습니다

맨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새극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 별 꽃 잎 산 옷 빈 집 피 물 불 꿈섬

그리고 너 나

이미 한 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가을날

◐ 문정희 시집 [양귀비 꽃 머리에 꽂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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