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 그리고 세탁소 딸내미》

우리 동문회 장일봉(40,자동차) 선배님의 피 끓는 해병대 시절 무용담 娼 시리즈를 아련히 흥미있게 읽었다.
남자들의 군대 얘기는 여전히 傳說인 모양이다.
여기에도 드라마 같은 군대 얘기 하나가 있다.

20여년 전 2001년도 어느 봄날,
우리 회사가 입주해 있던 건물의 사장님이 출근하는 나를 불러 세웠다.
자기 사무실에서 차 한잔 하자 하여 사무실에 들렀더니 상기된 표정으로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장님의 친한 친구분 얘기를 하였다.
사장님과 친구분은 철원에서 군대 생활을 함께 한 군대 동기인데, 친구분은 대구 서문시장에서 포목점을 하시고 하얀 백 바지와 구두에 알록달록한 셔츠를 즐겨 입으시는 멋쟁이시다.
한 날 아침에 멋쟁이 친구분이 사장님 사무실로 헐래벌떡 뛰어 왔더란다.

'봉환아 봉환아 큰일났다. 옛날 철원 부대앞 세탁소 아지매 딸내미가 아침마당에 나와서 날 찾고있다.'

얘기는,
사건이 터진 2001년 당시로부터 34년 전인 1967년 강원도 철원의 갈말읍에서 두 양반이 군대생활 할 때의 얘기다.
부대 입구에는 몇집의 가게와 식당, 여인숙 두어집에 세탁소까지 있어 제법 붐비는 산골 동네였다.
대대장 운전병이었던 친구 김상병은 대대장의 군복 등 세탁물들을 부대앞 세탁소에 수시로 맡기러 가곤 하였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내미 하나를 데리고 아줌마 혼자서 운영하는 세탁소였다.

딸내미는 붙임성이 좋아 세탁소에 꽤 자주 오는 훤칠한 김 병장에게 곧잘 말도 붙여 조잘조잘 얘기하길 좋아하였다.
김 병장도 면회오는 여자 친구 하나 없던 터에 찰싹 붙어 조잘대는 딸내미에게 은근 마음이 動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난봉꾼 기질이 없지 않은 김 병장이 피 끓는 군인일 때 세탁소 딸내미를 가만 둘 수 있었을까?

둘의 꿈 같은 짧은 시간이 흐르고 운전병 김병장은 제대를 하였다.
죄책감이었는지, 알수 없는 두려움에서인지 김 병장은 집이 부산이라는 거짓말을 남긴채 제대를 하였다.
김 병장이 제대한 후 딸내미는 배가 불러오고, 아줌마는 그길로 세탁소를 정리하여 딸내미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갔었단다.

그 때 그 딸내미가 뱃속의 그 아이와 함께 아버지를 찾으려고 아침마당에 나왔다는 것이다.
아침을 먹으며 가족들과 테레비를 보고 있는데 67년도 철원의 군부대가 어떻고, 세탁소가 어떻고 해서 가만히 들어보니 세탁소 딸내미가 할매가 되어 아들을 데리고 나와 자기를 찾더라는 것이다.

'봉환아 이 일을 우째야 되겠노?'
'우짜기는 우째 방송국에 당장 전화하고 내일 바로 서울 가야지'
다음날 두 사람은 서울로 가서 이산 가족상봉을 하였는데, 딸만 셋을 둔 친구분 김 병장은 졸지에 아들과 손자 둘까지 생겨 좋아서 어쩔줄 모른다 하였다.
할머니가 된 세탁소 딸내미는 그 다음 날로 아들 며느리에 손자 둘까지 데리고 대구로 내려와 순서로는 자기보다 한참 뒷 순번일 대구 할머니에게 '형님'이라는 존칭으로 家係 정리를 하더란다.

그로부터 또 20년이 지난 지금도 대구와 서울의 두집은 시샘이 날만큼 왁자지껄 잘 지낸다고 하였다. 어꺼제도 하얀 백구두, 중절모에 지팡이 짚은 김병장님을 길에서 만났다.
나는 마음속으로 '복도 많은 양반' 하며 시샘 하였다.

지난날,
세탁소 딸내미는 그 길로 엄마 따라 서울로 가서 애를 낳아 혼자서 아들 키우며 억측같이 살았고, 청계천에 빌딩까지 가지고 있다 하였다.
그것도, 아들은 考試 패스한 고위 관료가 되었다 하니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나 다름없다.
백 년도 안 되는 사람의 일생이 이리도 창창한 세월이구나 싶기도 하다.

사람이 살다가 이런 횡재가 어디 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침마당이나 열심히 보고 있어야 하나 싶다.
(2020. 6. 3 박종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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