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 도동서원(국가지정 사적 제488호)

도동서원은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 때 훼철 대상에서 제외된 전국 47개 주요 서원 중의 하나이다.
본래 서원은 선조 원년(1568)에 지방 유림들에 의해 현재 서원이 있는 곳에서 약 9km 정도 떨어진 비슬산 동북기슭에 쌍계서원으로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선조 37년(1604) 현 장소인 대니산 기슭에 사우를 중건하고 제당과 다른 건물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사림의 협조로 건립하였다.

이 후 1607년에 예조와 경상 감영 사이에 수차례 공문을 통해 서원명을 '도동'으로 정하고

최종적으로 사액이 결정되었으나 사액 현판의 하사와 치제(致祭)는 1610년(광해군 2) 4월에 설행(設行)되었다고 하며 

이 때 한훤당의 위패도 함께 봉안하였다.
서원은 2층 누각인 수월루와 강당인 중정당, 사당을 일직축선상에 배치하고

강당 앞의 좌우에는 동·서재를 두었는데, 기능에 따라 공간을 분화시킨 배치법과 자연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위계질서를 배푼 방법 등으로 볼 때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법의 전형을 보여 준다.
 행사와 교육의 중심인 강당은 높은 댓돌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2칸반의 주심포 맞배집으로

좌·우 퇴칸은 앞퇴가 있는 1칸씩의 온돌방이고 가운데 3칸은 앞면을 개방한 대청이다.

제사를 담당하는 공간인 사당은 가구식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심포 맞배집이며 정면 3칸마다 당판 문짝을 설치하였다.

강당을 둘러싼 담장은 기와를 이용한 맞담으로 매우 아름다우며, 맞담에 설치한 환주문은 그 구성이 특이하다.
 도동서원은 불필요한 장식을 삼가고 간소하게 지어진 조선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서원 내 강당(중정당)과 사당 그리고 이에 딸린 담장이 유형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고

전면의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은 사적 제488호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고 있다.




도동서원 앞 은행나무


서원의 수문장 구실을 하는 이 은행나무는 도동서원으로 사액된 선조 40년(1607년)에

당시 안동 부사로 재직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외증손인 정구 선생이 도동서원 사액 기념으로 식수한 나무로 전해진다.

수령은 약 400년이다.

이 노거수의 가지는 사방 20m 이상씩 퍼졌는데 북쪽으로 난 가지가 부러질 때, 

부러지기 전 3~4일간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전해진다.

도동서원은 사적 제488호로 환원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된 서원이다.


1605년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창건되어 김굉필의 위패를 모시다가 1607년 '도동'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소수서원, 병산서원, 도산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서원 중 하나이며,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없어지지 않고 보존된 곳이다.



수령이 400년된 이 은행 나무는 1607년 (선조40년)에 안동부사로 재직중이던

한훤당 김광필 선생의 외종손이며 이황 선생의 고제인 한강 정구 선생이 도동서원 중건 기념으로 식수 한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한원당 김광필(1454~1504)은 본관은 서흥(瑹興), 자는 대유(大猷),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며 특히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 동자라 칭하였다.

1480년(성종11년) 초시에 합격 하였으며, 1494년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에 의해 유일로 천거되어 주부,감찰,형조 좌량 등을 역임 하엿다





도동서원의 정문인 수월루

수월루 좌측으로는 한훤당 김굉필의 묘로 가는 길이 있다.

도동서원 안내소 문화 해설사가 상주한다.



                                                    수월루의 외삼문을 들어서면 서원의 강당인 중정당에 가기 위해 환주문을 지나게 된다.

환주문의 높이는 외산문처럼 낮다.

서원 안으로 들어갈 때 고개를 숙여 겸손함을 지니고 가기 위함 이라고 한다


강당을 둘러싼 담장은 기와를 이용한 맞담으로 매우 아름다우며, 맞담에 설치한 환주문은 그 구성이 특이하다

외삼문과 환주문을 지나야 나오는 강당인 중정당.


정면에 보이는 중정당이 원장과 유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인데

그 앞마당 좌 우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기거하던 동쪽 기숙사 '거인제"와

서쪽 기숙사 "거의제"가 서로마주보고 있다.

또한 강당의 정면 기단에는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4개와

다람쥐 모양의 동물이 장식되어 있다.

이 4개의 용머리는 서원앞 낙동강물이 넘쳐 오르는것을 막기 위한 비보책으로

물의 신 '용'을 상징한다.

그리고 강당 주위 담장은 흙과 기와로 쌓은 맞담으로 형태와 구성이 매우 아름 답다.

장판각은 유물과 목판을 보관 하던 곳이다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기거하던 동쪽 기숙사 '거인제"(동재)


강당 앞의 좌우에는 동·서재를 두었는데, 기능에 따라 공간을 분화시킨 배치법과 자연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위계질서를 배푼 방법 등으로 볼 때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법의 전형을 보여 준다.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기거하던 서쪽 기숙사 '거의제"(서재)



중정당은 강학이 이루어지던 공간으로 앞면5칸 옆면2칸 반 규모의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때 사람인(人)자 모양을한 맞배 지붕이다

온돌방으로 꾸민 좌우 끝 칸앞에 각각 작은 툇마루를 두었고 가운데 3칸 넓은 대청마루로 만들어 양쪽 툇마루와 통하도록 해 놓았다


중정당 뒤쪽에서본 환주문과 수월루


사당 앞에는 관광버스를 타고온 많은 사람들이 문화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서원 곳곳을 둘러 보고 있었다.

이 사당의 돌계단은 궁중에서나 볼수 있는 형식으로 왕의 허가를 얻어 왕이 살던 궁궐과 같은 형식으로 지어 졌다는 문화 해설사의 설명 이였다.


제사를 담당하는 공간인 사당은 가구식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심포 맞배집이며 정면 3칸마다 당판 문짝을 설치하였다

 

사당에는 김굉필을 주벽으로 하여 한강() 정구(, 1543∼1620)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되기를 원하는 김굉필의 도학정신을 표현한 벽화 두 점이 있다.

제향 후에 축문을 태우는 망례위는 일반적으로 석물로 지상에 조성되는데,

도동서원의 경우는 사당 서편 담에 작은 구덩이처럼 생긴 감()이 설치되어 있다.




수월루

수월루는 도동서원의 정문 격인 외삼문과 일종의 여유 공간인 누각으로 정면3칸 측면 2칸의 팔각 지붕이다

유생들의 휴식처나 강독 공간으로 사용 되었으며 누각에 올라서면 동북 쪽에서 흘러오는 낙동강과 고령 개진면 일대의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은행 나무- 김광필나무라고 명명되어 보호하고 있으나 실제 심은 사람은 조선중기 성리 학자인 한강 정구 선생으로 도동 서원이 사액된것을 기념하기위해

식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잇다.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펴치고 남인 예학의 대가로 알려진 한강 선생은 학문적으로 대선배이자 외증조부이기도 한

한훤당을 제향하는 서원 건립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렸다고 한다.


대니산 다람재에서 본 도동 서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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