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풍경

튀르키에와 에티오피아 - 낙동강에서

藝河 옆지기 淸雲 2023. 6. 7. 14:07

[ 튀르키에와 에티오피아 ]



'튀르키에'가 형제국인 이유>

'튀르키에'라는 국가를 말하자면 우리는 이스탄불,
지중해의 나라, 형제의 나라 등 여러 수식어를 떠올리지만, 정작 우리나라와 튀르키에가 "왜 '형제의 나라'라고 불리워지는가.."
그 이유를 알고 있는지요? 그 이유를 아느냐?
물으면 대다수는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6.25때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파병된15,000명이 넘는 튀르키에군은 이슬람교!!
대부분이 '자원병'이었으며, 그 중 3,500명이 사망(미국다음 많은 사상자)할 정도로 그들이 열심히 싸웠다는 사실...
'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했으며, '왜' 그렇게 고귀한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
튀르키에에 가면, 관공서나 호텔의 국기게양대에 튀르키에국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튀르키에인들 역시 한국인에게 굉장히 우호적이며,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대한민국
'코리아'를 Brother's country 라 부른다고 한다.
또, 한국말과 비슷한 단어가 많은 헝가리 사람들 역시 '한국이랑 헝가리랑 sister다' 라는 얘기를
한다고 한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여기에서 한 아침 라디오방송에서 나온 이야기를 잠시 참고해 보도록 한다.
튀르키에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투르크'라고 부른다.
우리가 코리아를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것처럼 ..
역사를 상기한다면, 과거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돌궐'이라는 나라....
투르크는 돌궐의 다른 발음이며, 같은 우랄알타이 계통이었던,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가깝게 지냈는데, 돌궐이 위구르에 멸망한 후, 남아있던 이들이 서방으로 이동하여, 결국 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원래 나라와 나라 사이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지만 돌궐과 고구려는 계속 우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지금의 튀르키에에 자리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여전히 그리고 당연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즉,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형제의 관계였던 것이다.
6.25 때부터가 아니고... 그렇다면 의문점 하나 우리는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리고 튀르키에인들은 왜 아직도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를까?
답은 간단하다.
식민사관의 잔재인 역사 교과서와 교육의 차이다.
우리나라의 중ᆞ고 국사 교과서는 '돌궐'이란 나라에 대해, 단지 몇 줄만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돌궐이 이동해 튀르키에가 됐다느니, 훈족이 이동해 헝가리가 됐다느니 하는 얘기는 전무하니 책과 교육의 탓도 있다.
튀르키에는 다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경험했던 튀르키에는 그들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아주 높은 편이며, 돌궐시절의 고구려라는 우방국에 대한 설명 역시
아주 매우 상세하다.
1500년전부터 '형제의 나라'였다는 설명과 함께..
그래서 대부분의 튀르키에인들은 한국을 사랑한다.
설령, 한국이 그들을 몰라줄지라도..
「실제로 튀르키에인들은 한국인들 역시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인들도 튀르키에를 형제의 나라라 칭하며, 그들을 사랑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튀르키에의 한 고위층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했다.
자신을 튀르키에인이라 소개하면, 한국인들에게서 큰 환영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데
대해 놀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튀르키에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돌아온 답은 대부분 '아니오'였다.
충격을 받고 튀르키에로 돌아간 그는 자국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한다.
'이제.. 짝사랑은 그만합시다..'
이런 어색한 기류가 급반전된 계기는 바로 2002 월드컵이었다.
'한국과 튀르키에는 형제의 나라, 튀르키에를 응원하자'라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타고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튀르키에 유학생들이 튀르키에인들의 따뜻한 한국사랑을 소개하면서, 튀르키에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다.
6.25 참전과 올림픽 등에서 나타난 그들의 한국사랑을 알게 된, 한국인들은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튀르키에의 홈구장과 홈팬들이 되어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하이라이트는 한국과 튀르키에의 3,4위전.
자국에서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튀르키에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튀르키에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한다.
경기는 한국선수들과 튀르키에선수들의 살가운 어깨동무로 끝이 났고, 튀르키에인들은 승리보다도 한국인들의 튀르키에사랑에 더욱 감동했으며 그렇게.. 한국과 튀르키에의 '형제애'는 더욱 굳건해졌다.
우리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튀르키에가 형제의 나라가 된 궁극적인 이유를 모르면, KBS의 어느 아나운서가 패널이었던 튀르키에인에게 '아우님'이라 불렀던, 어리석은 짓도 있었기에....
형제국가는 '형과 동생'을 따지자는 말이 아니다.
국가간의 형제는 곧 친구이며 우방이기에..
19세기초, 유럽으로 남진하려는 러시아의 힘을 얻어, 루마니아와 세르비아가 독립을 하게되고, 오스만튀르키에의 아르메니아 영토 대부분을 러시아가 차지하는 셈이 되자, 이에 분노한 투르크인들이 러시아와 붙은 아르메인들을 표적으로 인종청소라는 대학살을 감행(1차 대학살)...
20년후 또, 다시 오스만튀르키에 정부의 도움을 받은 투르크 이슬람교도들은 아르메니아인 5만명에
대학살을 자행한다.(2차 대학살)
게다가 투르크정부는 학살된 아르메니아인 외 175만명을 추가로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로 추방하고, 그 추방하는 과정에 60만명이 사막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1894년~1915년까지 2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은 겨우 30만명만이 살아 남는다.)
그후 1912년 발칸전쟁 때, 몬테니그로ᆞ불가리아ᆞ그리스가 오스만튀르키에에서 독립할 때도, 알게 모르게 러시아가 개입하여 아르메니아인을 도와줬다.
따라서,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하기 때문에 당연히 튀르키에는, 그 반대 쪽인 남한에만 병력을 파견했던
것이다.
물론, 혹자는 당시 튀르키에가 미국과의 우방적 연계로 말미암은 국제적 이득을 노린 선택일 뿐이였다rh 말하기도 하는데, 역사의 흐름이라는 큰 범주에서 바라본다면, 튀르키에가 2차 세계대전 때, 우리의 동맹국 중의 하나였던 이유가 필연적으로 러시아와 적대 관계일 수 밖에 없는, 과거사 때문이였다고 보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형제의 나라..
한국의 경제성장을 자기일처럼 기뻐하고 자부심을 갖는 나라,
2002년 월드컵 튀르키에전이 있던 날..
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비를 안받던 나라..
월드컵 때 우리가 흔든 튀르키에국기(國旗)가 튀르키에에 폭발적인 한국 바람을 일으켜, 그 후 튀르키에 수출이 2003년 59%, 2004년 71%나 늘어났다는 KOTRA 통계가 있다.
이런 관계를 지닌, 자기 나라로부터 수백만리 떨어진 곳에 보내는 의리와 애정을 주는 나라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대부분의 위인들은 평생 독서를 즐겼으며, 그들이 가장 즐겨 읽었던 분야는 역사라고 한다.
우린 세계사를 떠나 국사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관심이나 있었을까요?..
아니, 우리의 국사나 현대사를 과연 제대로 배운 적이나 있었나요?..
내 나라 역사조차 바로 알지 못하면서, 남의 역사를 논했던 우리의 모습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에티오피아 >

아프리카 나라 중에 '에티오피아'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아마 대부분 사람은 '가난'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가 그렇다 해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가난'이 아닌 '감사함'이란 단어를 먼저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 그것을 누리게 된 배경에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19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은 에티오피아군은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전하였습니다.
그러자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제네바 국제연맹에 가서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에티오피아를 도와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약하고 득 될 것이 없는 나라를 선뜻 돕겠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작은 도움조차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셀라시에 황제는 에티오피아의 젊은이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킵니다.
드디어 1941년 이탈리아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그 후 유엔이 설립되자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에서 "우리가 힘들 때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지만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와 같은 나라가 나오지 않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 약한 나라를 도와주자!"라는 '집단안보'를 주장하고 나섭니다.
유엔은 셀라시에 황제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집단안보'는 세계 평화를 향한 진보적 한 걸음을 떼게 한 위대한 결과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그 후, 첫 번째로 발발한 전쟁이 공교롭게도 '한국전쟁 6.25'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셀라시에 황제는 '집단안보'를 주장하며 유엔에 한국을 도울 것을 강조했습니다.
셀라시에 황제는 왕실 근위대였던 '강뉴 부대'를 파병하기로 하였습니다.
강뉴란 말은 에티오피아어로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
2. 초전박살
한마디로 한국전쟁에서 두 가지의 뜻을 실천하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셀라시에 황제는 '강뉴 부대'를 파병할 당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 에티오피아가 항상 추구해왔던 '세계평화를 위한 집단안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대들은 오늘 장도에 오르는 것이다.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
강뉴 부대는 16개국 참전군인 중에서도 가장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5차에 걸쳐 6,037명의 참전하였고, 123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기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만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253번의 전투에서 253번의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어떤 참전용사들은 월급을 에티오피아로 보내지 않고, 부대 안에 '보화원'이라는 보육원을 만들어 전쟁고아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잠을 잘 때는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을 옆에서 지켜줬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마운 강뉴 부대원들은 6.25가 끝나고 모국으로 돌아가자 7년 동안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게 됩니다.
목축업을 하던 나라에 풀이 없어지자 가축들은 굶어 죽었고, 아프리카 최강국이었던 에티오피아는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어느 해에는 100만 명이 굶어 죽기도 했습니다.
가난에 시달리자 사람들은 봉기했고, 1974년 '맹기스투'라는 군인이 공산주의를 주장하며 쿠데타를 일으켜 에티오피아는 공산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셀라시에 황제는 수술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고 발표했지만 측근에 의하면 독살형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세계평화를 위해 더욱이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노력했던 그가 그렇게 생을 마감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강뉴 부대원들 또한 공산주의와 싸운 대가로 감옥에 가두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등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게 됩니다.
핍박을 견디다 못해 어떤 분들은 6.25 참전 사실을 숨긴 채 이름도 바꾸고 뿔뿔이 흩어져 숨어버렸다고 합니다. 그 후 에티오피아는 공산정권에서 민주정부로 바뀐 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참전 용사들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6.25 당시 나라의 존망이 풍전등화였을 때, 그분들은 대한민국이 지구 상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달려왔고, 가장 용감히 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모르고 그저 가난한 아프리카의 나라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왠지!!!!
왜 우리 역사교과서는 이런 사실들을 가르치지 않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