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풍경

광주사태 진상조사 기록에 나타난 사망자 숫자 등에 대한 소고(小考)- 와룡산 연산홍 전망대에서

藝河 옆지기 淸雲 2023. 4. 13. 17:54

《광주사태 진상조사 기록에 나타난 사망자 숫자 등에 대한 소고(小考)》
☆ 먼저 본 글을 대하는 님께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읽어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어느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한 토막입니다.
"에이, 아닐걸요.
영화 화려한 휴가 보세요. 영화 보면 전남대 앞에서 총 맞아 쓰러진 대학생만 해도 수백 명인데 어떻게 166명만 죽었다는 거예요?
5.18 때 166명이 죽었다는 게 말이 안 되죠."

우리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리는 광주사태를 이런 식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주사태를 영화 따위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요하고 끈질기게 부풀려져 확대재생산 되는 5.18의 오도(誤導)된 정보에 세뇌되었습니다.
지금 님께서는 광주사태의 민간인 사망자 수를 얼마쯤으로 알고 계십니까?

주로 30~40대 연령층이 많은 필자의 회사 직원들에게 "5.18 광주민주화 운동 때 민간인 사망자 수를 얼마쯤으로 아는지 직관적으로 말해 보세요"라고 개별적으로 조용히 설문해 보았습니다.
젊은 사람들의 굉주사태에 대한 실제 인식이 매우 궁금하였습니다.
직원 스무명에게 필자가 직접 설문하여 최고 숫자와 최저 숫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18명을 평균한 결과 680명이 나왔습니다. 심지어 최다 숫자는 3,500명으로 답한 직원이 있었고, 최저 숫자가 450명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은연중 인지하고 있는 광주사태에 대한 인식의 현실입니다.
광주사태 민간인 사망자는 166명입니다.

본 小考에서는, 광주사태 또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위원회 등의 실제 기록에 나타나는 사망자 숫자 등을 살펴보고 과연 진실과 역사의 왜곡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상식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광주 진상조사위원회 조사 보고서 자료, 故 전두환 前 대통령 사자명예훼손 재판 기록, 기독교단 개혁운동단체 자료, 곰돌이 푸 님의 블로그, 광주 인권위 자료 등 이미 검증되거나 익히 알려진 자료와 숫자에 근거하여 사망자 수, 사망 장소 등 쟁점 사안별로 참고하여 인용, 편집, 정리하였다는 것을 우선 밝힙니다.

광주사태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정권과 정치인의 입맛대로 확대 재생산 된 광주사태의 진상은, 희생자와 민주유공자 숫자에서 부터 많은 허구적 '카더라'가 난무하였고 무책임한 그들 정치인 나부랭이들은 그것을 모르는척 외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광주사태 사망자의 숫자 및 사망 원인>
1980년 ​5월 18일 전남대 학생들의 소요로 시작된 광주 사태의 전체 사망자 숫자는, 민간인 166명, 군인 23명, 경찰 4명이 발생하였으며 78명의 행방 불명자가 발생한 것으로 공식 집계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민간인 사망자 166명 중 계엄군에 의한 학살이라고 밝혀진 희생자가 과연 몇 명인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계엄군에 의한 사망자 부분은 군의 명예와도 관련된 사항으로서 전두환 前 대통령을 비롯한 군 관계자 등이 발포 명령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군이 국민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기 발포를 했을리가 만무하다는 것이 전두환 前 대통령 등의 주장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광주사태시 사망한 사람들의 사망 원인을 살펴보고 규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안입니다.

광주사태 사망자 숫자와 사망 원인을 새삼 또 되짚는 것은, 광주사태에서 국군의 총검에 의한 희생자의 발생이 과연 '학살'이라고 규정 할만한 것인지를 살펴보고, 또한 당시 시민군 치하 닷새 동안의 광주가 과연 안전하고 자유로운 지역이였는지, 무정부 상태의 무법천지였는지를 가늠하는 상식적 잣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체 사망자의 숫자는 당시 계엄군이 발표한 사망자 수와 김영삼 정권에 의한 광주진실규명위원회에서 밝힌 사망자 숫자가 대부분 일치되며, 사망 원인 또한 거의 동일하게 밝혀졌습니다.
​1985년 당시 계엄군의 조사 발표 내용이 실제사실에 충실하였으며, 1995년 진실규명위원회는 2,000~5,000명으로 사망자 숫자를 추정하고 이를 밝혀내겠다고 야심차게 조사했지만 계엄군의 기존 조사 자료가 틀리지 않다는 점만 확인 시켜주었습니다.

김영삼 정권의 광주진실규명위원회에 의해 계엄군의 발표 내용과 숫자가 팩트로 입증되면서 사망자 숫자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는것으로 확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 대다수는 광주사태의 사망자가 수백. 수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 또한 광주 5.18에 대한 왜곡과 집단 세뇌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아직도 광주사태 2차 희생자라는 이름으로 사망자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광주사태 기간에 입은 부상의 원인으로 사망에 이른자와  광주사태의  트라우마로 자살한 사람 등 광주사태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주사태 사망자는 이런 저런 이유로 계속 늘고 있으니 참으로 웃기는 광주입니다.

사망 원인가운데, 계엄군이 철수한 5월 22일부터 전남도청 탈환 작전이 있었던 5월 27일 사이 5일 동안 시민군 치하의 광주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사망자가 무려 60명으로 대다수의 사망자는 시민군 자신이거나 일반 시민들로서 이들의 사망 원인은 명백히 계엄군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전체 사망자166명 중 36%인 60명이 교통사고 사망자로 나타납니다.

아래에 ​인용된 광주사태 사망자 수는 사태 당시 계엄군의 조사 발표와 1995년 문민정부 시절 서울지검의 광주진실규명위원회 발표 자료를 인용하여 객관적 수치로 대비하여 살펴본 것입니다.

​<​1983년 계엄사 조사 발표 자료>
민간인 사망자 162명에 대해 사인을 분석 분류하였습니다.
사망자162명 중 총상은 72%인 117명, 그 가운데 80%인 88명은 시민군간의 오인 사격 혹은 민가에서의 가족단위 살해, 시민군의 강온파간 대립으로 인한 충돌 등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총상은 주로 ​M1, AR, 카빈소총에 의한 것으로 M1, AR, 카빈소총은 무기고에 있던 것들로 시민군들만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

​타박상 사망자 18명은 탈취한 차량을 몰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사망, 수류탄 파편상 12명은 무기고에서 탈취한 수류탄으로 난동자들이 일으킨 수류탄 사고에 의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계엄군은 수류탄 자체를 소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11명의 자상 사망자는 계엄군을 모략하여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시민군 스스로 자해한 행위로 밝혀졌고, 화상에 의한 4명의 사망자는 난동자들의 방화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실제로 광주사태 당시 시민군에 의한 다수의 방화가 있었다는 것이 명백히 입증되고 있습니다.

당시 계엄사는 사망자의 실제 사인 규명을 위해 의사, 변호사, 군 수사기관, 시민대표로 구성된 합동조사반으로 하여금 소상히 조사하였으며, 유가족에게 확인하도록 공시하여 136명의 사망자 유족들은 위 사망 원인을 각각 시인하고 시신을 인수해 갔으나 26명의 사망자는 유족이 나타나지 않아 공원묘지에 가매장하였습니다.

 <1995년 검찰조사 결과  발표자료>
​민간인 사망자 166명 중 165명에 대해 사인을 분석 분류하였습니다.
165명 중 총상은 80%인 131명, 자상 4명, 타박사 18명, 차량사 12명으로 단순화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총상 131명 중 74%가 M-16 총상, 나머지 26%인 35명이 카빈총상(26명) 및 기타총상(9명)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기타 총기는 M1, AR, 기관총 등 시민군이 무장한 것이고 계엄군에게는 오직 M-16만 있었습니다.

위의 내용에서 계엄사 조사를 무시하고 검찰 조사 결과만으로도 M-16에 의한 총상 외 최소한 35명은 시민군 자체의 총기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확정됩니다. ​계엄군은 M-16만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공개된 광주사태 당시 짚차에서 복면을 하고 있는 시민군이 M-16을 소지하고 있는 모습이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M-16에 의해 사망한 희생자들 역시 상당 숫자가 시민군에 의한 사망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습니다.
​(*시민군은 62정의 M-16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교조 초대위원장 윤영규가 증언하였습니다.)

​따라서 민간인 가운데 시민군의 총에 의해 사망한 수는 최소 35명이라는 사실이며 사실은 더 많을 것이라는 것이 양측 조사의 공통된 결론입니다. 즉 166명의 민간인 사망자 중 최소 35명, 최대 88명은 시민군에 의한 총상 사망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
​그에 대한 좀 더 명백한 근거로 총기 사망 장소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시민군 포함 민간인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했던 5월 21일 하루를 살펴 보면, 21일 계엄군은 도청과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5월 21일 하루 동안  카빈총에 의한 사망자의 발생 장소가 무등극장 앞(1), 전남대(3), 광주기독병원(1), 교도소(2),도청(1), 동구청앞(1) 등으로 나타나며, 나머지 7명은 사망 장소 불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계엄군의 총격에 의한 사망으로 분류한M-16 에 의한 사망자 32명의 사망 장소를 보면 도청 앞(6명), 전남대 부근(8명), 광주교도소(4명),무등극장, 광주경찰서, 금남로, 광천주조장, 광주기독병원, 대인동 중앙예식장, 중흥동 주거지 등 자택, 송암동, 광주여고, 나주, 수미다방, 한일은행, 제일은행, 동구청 앞 등으로 분산되어 나타나며, 나머지는 사망 장소가 불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카빈이든 M16이든 계엄군이 주둔해 있던 지역에서 죽은 사람보다 계엄군이 없었던 여타 지역에서 죽은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모두가 군에 의한 살상일까요?​
왜 이처럼 계엄군이 없었던 지역에서 총기 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많았을까요?
​왜 방화로 인한 사망자 4명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여 주목하지 않을까요?

​이처럼 계엄군의 총격에 의해 죽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 대부분이 시민군의 발포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이 상호 조사의 내용에서 명백하게 밝혀져 보고 되어 있는데도 이 나라의 정치인과 우리 국민은 이에 대해 왜 침묵하여 외면하고 있을까요?

​​경상도 공수부대가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려 왔다더라ᆢ 2,000명 이상 암매장 되었다더라 ... 임산부 배를 갈라서 애를 꺼냈다더라 ... 공수부대가 여중생을 강간했다더라... 여대생의 가슴을 칼로 도려냈다더라ᆢ 공수부대원들이 뽕을 해서 제정신들이 아니다. 카더라 카더라의 수많은 유언비어 모두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혼란을 부추기기 위해 퍼뜨린 악의적 유언비어였습니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 또한 경상도 출신 공수부대원이 아니라 전라도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공수부대 지휘관 또한 전라도 출신 정중 31사단장 이었다는 사실도 진실규명위에서 밝혀진 사실입니다.

​헬기 기총 사격를 보았다는 조비오 신부를 거짓말쟁이 사탄이라고 했다 하여 광란의 굿판을 벌여 전직 대통령을 시해(弑害)한 문재인 종북정권의 전두환 前 대통령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재판' 그것에서도 더러 났듯이 군용헬기에서 기관총으로 난사했다는 부분에 대해서 당시 헬기를 직접 조종했던 당사자가 법정에서 사실이 아니라는 증언을 하고 있는데도 귀 기울이지 않고 슬며시 묻어 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광주 사태에서 국군에 의해 의도된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는 것이 기록에서 밝히고 있는데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광주사태는, 학살자 전두환의 발포 명령에 따라 수천 명의 무고한 광주 시민이 고귀한 희생을 치른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여 인식하고 있으니 사실과 달라도 너무 다른 인식의 오류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광주 5.18은 의외로 단순한 사건일 것입니다.
처음 여느 학생 시위와 마찬가지의 시위였던 것이 과격 상황으로 바뀌어 소요 수준의 폭동 사태가 되는데는 불과 하루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습니다.
게엄군이 철수한 후 행정, 치안, 통신, 교통이 마비된 상태의 '광주해방구' 그 닷새는 무고한 광주의 시민들에게는 악몽의 시간이었다는 수 많은 증언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 실제입니다.

​방화 약탈로 무법천지였던 LA 폭동을 우리가 민주화 운동이라고 하지 않듯이 광주사태 또한 우발적 폭동화와 급속한 약탈 상황으로의 전개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닙니다. 그냥 폭동사태 그 자체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 그것은 광주사태입니다.

모두가 정치 또는 정치인 나부랭이들의 필요에 의해 적당히 타협하여 두루뭉술 뭉개어 덮어서 역사를 오도하고 있는 것이니, 머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또 다시 역사바로세우기가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제 5.18은 정치가 개입하지 않는 역사의 몫으로 그 진실이 고스란히 더러 나야 합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입니다.​
(2023. 4. 10 박종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