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풍경

[야담야화]김삿갓의 요강예찬 - 동촌 그리고 패닝샷

藝河 옆지기 淸雲 2023. 2. 7. 16:17

김삿갓의 요강예찬

 
 

해가 마을 어귀 나뭇가지에도 걸리기 전 작은 마을에서 글과 술에 취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하늘을 향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웃음 소리를 듣고 터덜터덜 길을 가던 한 나그네가 살짝 삿갓을 들어 올렸다.

바로 하루끼니 신세질 곳을 찾아다니던 김삿갓이었다.

주인 어른 계시오니까?

김삿갓은 마치 제 집인 양 성큼성큼 대문안으로 들어섰다.

넌 누군데 감히 어른들의 여흥을 깨느냐?

김삿갓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마을 원로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하고 있는 듯 했다.

풍류를 즐기던 손님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흥을 깬 불청객을 쏘아보았다.

남루한 옷차림에 떨어져 가는 삿갓 무엇보다 쾌쾌한 냄새가 마당을 지나 마루 위에까지 올라와 사람들은 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김삿갓을 쳐다보았다.

소인은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이온데 글을 나누는 소리가 흥취 있게 들리기에 이렇게 실례를 했습니다. 

소인도 한 수 해보리까?

어허! 젊은 놈이 어른을 농락하는구나. 

술 생각이 나면 주막으로 갈 일이지 여기는 함부로 오는 곳이 아니다.

주인 영감으로 보이는 노인은 자중의 분위기가 깨어진 것이 마음에 안드는 듯 김삿갓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소인이 이리 들어온 건 술냄새 때문이 아니오라 글냄새 때문이었습니다.

노인분들께서는 글에 노소를 따지시는군요.

김삿갓은 우선 가벼운 실랑이로 주인 영감의 말을 받아쳤다.

노인 역시 김삿갓의 재치있는 나무람에 무조건 화를 낼 수 없어 체통을 지키며 김삿갓을 쫓아낼 궁리를 하였다.

음... 그래. 일리는 있는 말이군. 

그럼 내가 운을 띄울 테니 시를 지어보도록 하여라.

잘하면 좋은 상이 나가지만 얼토당토않은 걸 지껄이면 그나마도 없을 것이야.

노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빙그레 웃고는 요강을 들고 가래침을 탁 뱉고 난 뒤 김삿갓을 바라보았다.

자 운은 놔 누고 글제를 이 요강으로 두고 한번 읊어보게

순간 좌중의 손님들은 주인 영감의 얄궂은 문제를 듣자마자 김삿갓을 비웃기 시작하였다.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도록 웃는 사람 술상을 손으로 치면서 웃는 사람 옆 사람을 부여잡으며 웃는 사람 등등 각각 얼굴이 벌개 지도록 한참을 지나도 웃음이 그칠 줄 몰랐다.

그러나 김삿갓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요강을 무슨 신주단지라도 되는 듯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저 귀한 것에 대한 시를 지으라구요? 

음... 어울릴만한 예찬을 해드리이다.

김삿갓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와 태도에 바닥을 치며 웃어대던 손님들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김삿갓을 바라보았다.

김삿갓은 여유있는 웃음을 지으며 차근차근 요강을 예찬하기 시작했다.

요강 덕분으로 밤중에도 귀찮게 드나들지 않으니 편히 누운 자리에 가까이 있어 매우 고맙도다

술주정꾼도 그 앞에는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어여쁜 계집이 끼고 앉으면 살이 보일까 조심조심 속옷을 걷도다

똥똥하고 단단한 생김새는 유명한 안성마춤인데 쏴 하고 오줌누는 소리는 흰 폭포가 나는 듯하도다

가장 공이 많은 것은 비바람 치는 새벽에 편리하고 모든 곡식의 거름이 되어 사람을 살찌우는 것이니라.

순식간에 요강은 없어서는 안될 도구요 모든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도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김삿갓을 비웃던 손님들은 요강예찬을 듣고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김삿갓을 바라보았다.

끄응...

요강이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었던가?

그려. 

내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게 스승님과 나랏님 그리고 부모님을 제외하고 또 있는 줄 몰랐구려.

헐헐헐… 이런 묘하군 묘해. 내 글제도 이상했지만 당신의 글솜씨는 더욱 신기하군.

주인 영감은 자신의 비웃음을 거두고 허름한 옷차림 밑에 있는 김삿갓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그를 대청위로 초대하였다.

이렇게 해서 김삿갓은 그날 저녁을 푸짐하게 대접받고도 닷새나 더 머무르다가 길을 떠날 수 있었다.

- 옮겨온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