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풍경

아내와 나 사이 - 달성습지 구라재에서

藝河 옆지기 淸雲 2022. 9. 16. 10:23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시인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들어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ㆍㆍㆍㆍㆍㆍㆍㆍㆍ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가올 시간이지만
이미 충분히 예견된 탓에
낯설지 않은 미래를 이렇게 부릅니다.

노후(老後)야말로
‘오래된 미래’중 하나지요.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피해갈 수 없는 외길에서
지금의 이 단계를 지나면
다음 코스에서는
뭐가 나올지 우린 다 알지요.

다 알기 때문에 오래되었고,
그럼에도 아직은 오지 않았기에
미래(未來)인 거지요.

지난 2019년 봄
평사리 최참판 댁 행랑채 마당에서
박경리 문학관 주최로
‘제1회 '섬진강에 벚꽃 피면' 전국시낭송대회’가 열렸습니다.

6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낭송시가
바로 이생진 시인의 이 작품입니다.

7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 낭송가의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에 실려 낭송된 이 시는
청중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하였습니다.

좋은 낭송은
시 속의 ‘나’와
낭송하는 ‘나’와
그것을 듣고있는 ‘나’를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주인인 기억이
하나둘 나를 빠져나가서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나이.

나는 창문을 열려고 갔다가
그새 거기 간 목적을 잊어버리고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에 갔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앞이 막막하고
울컥하지 않습니까?

시인은 차분하게
이 참담한 상황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책하는 목소리에 담아
우리를 나무라지요.
거창하게
인생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며

마치 삶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나 한 것처럼
핏대를 올리는 당신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고.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나 사이’의 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지요.

오늘도 당신은
좋은 일만 있을겁니다.

- 김남호 /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