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풍경

평양감사와 기생의 장기 내기 - 진천천에서

藝河 옆지기 淸雲 2022. 4. 20. 16:53

 

 

평양감사와 기생의 장기 내기

 
 
 

어느날 평양감사 박엽이 동헌에 나가 앉아 여러

사람들과 한담을 하는 중에 문득 장기 이야기가

나오자 서로 장기겨루기를 하자고 했다. 

박엽은 원체 장기를 즐겨하는 사람이어서 대뜸

장기경기를 벌려 놓았다. 

그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했는데

그 중에는 소백주라는 평양 출신의 젊은 기생도

끼여있었다. 

박엽은 장기판에 여자가 끼어들면, 질색인지라

소백주를 보자 이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날따라 친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 차마

큰소리를 치지 못하였다.

"여봐라, 저 기생에게 일러라. 여자가 장기경기

구경하면 안된다고."

아전이 평양감사에게 허리를 굽석거리고 나서

소백주에게 뛰어갔다.

"얘, 감사어른이 자리를 피하라고 하신다."

그러자 소백주는 당돌하게 대꾸를 하였다.

"남자만 사람이고 여자는 사람이 아니오이까?

더구나 감사어른께선 공무를 보시지 않고

휴식삼아 손님들과 장기놀이 하는데 멀찌감치

서서 구경하는게 뭐가 잘못이나이까?"

아전은 소백주를 생각해서 이렇게 말해주었다.

"얘, 어쨌든 감사의 명이니 일단 자리를 피하고

보렴."

하지만 소백주의 태도는 여전히 당돌했다.

"소녀의 행동이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면 벌을

받겠어요."

"원, 애두."

아전은 소백주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와

박엽에게 말하였다.

"감사나리, 사실 저애는 혹시 나리께서 질까봐

걱정이 되어서..."

사실 아전은 소백주가 공연히 봉변을 당할까봐

감사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뭐라구?"

박엽은 기생에게서 동정을 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가 치밀었으나 주위에 사람들이 있고

또한 놀음판이 깨어질까봐 참고말았다. 

다음순간 박엽의 머리속에 한가지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저 기생에게 내가 찾는다고 일러라."

"예잇!"

박엽의 속내를 알리없는 아전은 씽하고 달려가

소백주를 데려왔으며, 박엽은 그녀를 훑어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장기 걱정을 한다면서?"

"......"

"네 마음 참으로 갸륵하구나. 그런데 우리 어디

내기를 할까."

소백주는 고개를 다소곳한 채로 박엽의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만약 내기에서 지면 볼기를 맞을 것이요

이기면 내옆에서 장기경기를 실컷 구경하도록

해주마."

평암감사 박엽이 어린 기생 소백주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아전은 깜짝 놀랐다.

박엽은 본시 성미가 조폭한지라 소백주가 지면

큰 봉변을 당할 것은 뻔했다.

소백주를 위한다는 게 오히려 구렁텅이에 몰아

넣었으니 어쨌으면 좋을지 몰랐다.

'이제라도 저애가 돌아섰으면..."

그런데 의외로 소백주는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겠사와요."

사람들은 소백주 말을 듣고 깜짝 놀랐으며 일개

기생이 감사와 겨루다니? 박엽은 기고만장해서

큰소리로 말했다.

"네 여기 장기판에 있는 쪽들을 가지고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한 연에 다 들어가도록 시조를

지으라."

사람들은 다시금 놀랐으며 장기쪽들을 가지고

한 연에 시조를 지으라고 하니, 그것은 분명코

어린 기생을 욕보이려는 속심이였기 때문이다.

소백주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장기판을 한번

훑고는 랑랑한 목소리로 시조를 내리읊었다. 

상공을 뵈온 후에 사사(事事)를 믿자오매 졸직

(拙直)한 마음에 병이 들까 염려려니 이리하마

저리차 하시니 백년동포(同胞) 하오리다. 

소백주의 구슬같은 맑은 목소리에 심취되였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탄복하였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은유수법으로 연정의

내용을 담은 시조를 재치있게 지었던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첫구를 들었을때 소백주가 무슨

연정에 잡힌 문구를 읊는가 하고 실망했었다.

그런데 마지막구까지 들어보니, 감사가 요구한

대로 장기쪽들을 가지고 훌륭한 시조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상공'은 상공을 의미하거니와 장기의 상(象)을,

'사사'는 매일 또는, 매사의 의미와 함께 장기의

사(士)를,

그리고 '졸직'은 옹졸하고 고지식하다는 의미와

함께 장기의 졸(卒)을, '병'은 앓다는 뜻과 함께

장기의 병(兵)을,

'동포'는 함께 안는다는 뜻과 함께 장기의 포(包)

를 형상하였다.

그리고 '이리하마 저리차'는 말그대로 이리하마

저리하자란 의미를 담고있으면서

'이리하마'에서 '마'는 장기의 마(馬)로, '저리차'

에서 '차'는 장기의 차(車)로 형상하였다.

결국 한자와 우리 말을 이용하여 장기의 쪽들인

'상, 사, 졸, 병, 마, 차, 포'를 이용, 훌륭한 시조를

지어냈던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소백주의 시짓는 재간을 칭찬

하였고 박엽은 어린 기생을 깔보다가 그만 코를

떼우고 말았다.

일단 내기를 했으니 박엽은 약속대로 소백주를

옆에 두고 장기구경을 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이 시조를 한양대학교 한문학자인 정민

교수는 다르게 해석하였고 그의 해석은 실제로

장기판에 대한 훈수라는 것이다. 즉

'상으로 공격을 하니 사둘을 믿고 계시온데 졸이

버티고 있어도 병이 들어오면 어찌하나요?

마로 이리 공격해와도 차로 저리 박으시면 뒤에

포가 버티고 있지요.'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

즉 곤경에 빠진 박엽의 상황을 교묘하게 훈수를

하여 이기게 만들어주는 지혜라는 것이다.

- 옮겨온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