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풍경

품격 있는 적선(積善)- 옷골마을의 가을

藝河 옆지기 淸雲 2021. 12. 15. 11:00

 

품격 있는 적선(積善)

 

 

조진사가 지필묵을 사기 위해 오랜만에 친히

장터에 나왔으며 설을 세고 난후 첫장날이라

점쟁이 좌판이 보였다.

조진사는 운수나 볼까나 하고 걸음을 멈추고

거적때기를 깔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점쟁이

앞에 두루마기 자락을 추스리며 주저 앉았다.

꾀죄죄한 점쟁이가 육갑을 짚어보고 칠월에

물조심만 하면 운수대통은 아니더라도 무병

무탈이라 하자 조진사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 나이에 무슨 대통할 일이 있겠소.

무병무탈이면 족하지..."

바로 그때,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이구동성

으로 소리쳤다.

"어~ 이게 누구야!"

조진사와 점쟁이는 서로 두 손을 마주 잡았고

두 사람은 국밥집에 마주 앉아서 탁배기 잔을

부딪히며 과거 서당시절 이야기꽃을 피웠다.

점쟁이가 킬킬 웃으며...

"그날 밤 버드나무 위에 올라가 동네 처녀들이

멱감는 것을 훔쳐보다, 네가 떨어져 개울물에

풍덩...!"

조진사는 그게 어제의 일처럼 생각나 웃으며

입속의 탁배기를 쏟아내며 뒤집어졌다.

'푸하하... 푸르르...'

이웃에 살던 개구쟁이 불알친구인 두 사람은

삼십여년 만에 처음 만나 술잔을 주고받으며

그리운 그 시절로 돌아갔다.

웃음꽃이 끊어지지 않던 분위기가 한숨으로

바뀐 것은, 조진사가 점쟁이 친구의 살아온

길을 물어본 후였다.

점쟁이 친구는 열다섯살 때에 삼년동안 몸져

누웠던 아버지가 빚만 잔뜩 남겨놓고, 이승을

하직한 후에 빚을 감당할 수가 없어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했다.

타향을 떠돌며 가장으로 온갖 고생을 다하며

살아온 얘기에, 조진사는 눈시울을 붉혔으며

점쟁이 친구가 말했다.

''나이를 먹으니 고향생각 나서 세밑에 돌아와

그간 모아뒀던 돈으로 삼십 여년 전, 야반도주

할 때에 졌던 빚을 갚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이 짓을 하고 있네."

어둠살이 내려앉고 술도 올라, 일어나 술값을

내려던 조진사는 역정을 냈으며, 통시에 가는

것이 수상쩍다 했더니, 술값은 벌써 점쟁이가

계산해버렸다.

"자네가 준 복채로 계산을 했으니 자네가 술을

산게야."

며칠 후, 부티나는 노인네가 두리번거리더니

점쟁이 앞에 앉았다.

"내가 크나 큰 갈림길에 서있네. 할건가 말건가..."

점쟁이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말했다.

''나는 그렇게 용하지 않소이다. 다른데 가서..."

"다른데 가서도 점괘를 봤소. 한번 봐 주시오."

육갑을 짚어 본 점쟁이가 말했다.

''하지 마시오. 늙어서는 재물보다 무탈이요."

노인은 고개를 끄떡이면서 복채 한 냥을 놓고

갔으며, 열흘쯤 지나서 그 부티나는 노인네가

다시 찾아와 점쟁이의 두 손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하라했는데 도사님 혼자 하지 마라 했소.

그 말이 맞았소. 패가망신 당할뻔 했소. 복채를

제대로 드리지요."

거듭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리며 주머니 하나를

놓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노인의 도포자락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있던

점쟁이가 주머니를 열어보니 엄청난 돈이 들어

있어서 기절할 뻔 했다.

강건너 마을 강대인의 사랑방에, 조촐한 술상을

두고 두사람이 마주 앉았고 이집 주인 강대인과

조진사였다.

조진사가 강대인에게 술잔을 올리면서 ''외삼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하자 술잔을 받아서 마신

강대인이,

"자네가 그토록 속이 깊은 줄 몰랐네."라고 하자

조진사가 대답했다.

"외삼촌의 누님한테 배웠어요."

"내 누님이라니...?"

"제 어머님 말이예요."

강대인은 조카 조진사의 부탁을 받고 점을 본뒤

복채주머니를 던져주고 온 부티나는 노인네다.

조진사가 열살쯤 됐을때 장날 어머니 손을 잡고

장에 갈때 어머니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내 주머니..."

아무리 찾아봐도 돈주머니가 없었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자, 저만치서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이

지팡이 짚고 절룩거리며 헐레벌떡 오고 있었다.

노인은 한손에 어머니께서 흘린 빨간 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길바닥에서 이 주머니를 주웠지만

걸음이 느려 빨리 오질 못했다며 그가 주머니를

어머니에게 건네주고 뒤돌아 가는데,

"여보시오!" 하며 어머니가 그 노인을 불렀으며

주머니 속의 돈을 헤아리더니,

''주머니는 내것이 맞지만 주머니 속에는 원래

열두냥이 들어 있었으니 이 나머지는 내 돈이

아니요."

어머니께서는 한웅큼 돈을 그 노인네의 조끼

주머니에 찔러주었다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대인이 빙긋이 웃었다.

조진사는 이때 느낀 마음으로 친구 점쟁이의

가난한 마음을 도와준 것이다.

- 옮겨온글 -

 

[출처] 품격 있는 적선(積善)|작성자 청솔